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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 콘텐츠

262.담락재(湛樂齋 35.0×90.0)

  • 작성일2013-09-04
  • 작성자단원미술관
  • 조회수407

김홍도가 안기 찰방을 마치면서 인근의 풍산읍 상리동에 소재한 선성이씨(宣城李氏) 집안의 체화정(?華亭) 사랑방에 써준 자필 현판이다. 관지가 ‘丙午夏壇園書(1786년 여름에 단원이 썼다)“고 되어 있어, 이임 직전인 4월 아니면 5월에 쓴 것을 알 수 있다. ’담락(湛樂)‘이란 말은 <시경(詩經)>소아(小雅)의 <녹평(鹿鳴)>편에 나오는 귀절 ’화락이담(和樂而湛 화락함이 끝이 없네)‘의 준말이다. 두인(頭印)은 백문타원인 ’청상지일(淸賞之一)‘이며, 작가인은 주문방인 ’홍도지인(弘道之印)‘과 백문방인 고안거사(高眼居士)이다. 글의 내용이나 고안거사의 뜻이 모두 당시 유유자적했던 생활상을 연상케 한다. 262.담락재(湛樂齋 35.0×90.0) 김홍도가 안기 찰방을 마치면서 인근의 풍산읍 상리동에 소재한 선성이씨(宣城李氏) 집안의 체화정(?華亭) 사랑방에 써준 자필 현판이다. 관지가 ‘丙午夏壇園書(1786년 여름에 단원이 썼다)“고 되어 있어, 이임 직전인 4월 아니면 5월에 쓴 것을 알 수 있다. ’담락(湛樂)‘이란 말은 <시경(詩經)>소아(小雅)의 <녹평(鹿鳴)>편에 나오는 귀절 ’화락이담(和樂而湛 화락함이 끝이 없네)‘의 준말이다. 두인(頭印)은 백문타원인 ’청상지일(淸賞之一)‘이며, 작가인은 주문방인 ’홍도지인(弘道之印)‘과 백문방인 고안거사(高眼居士)이다. 글의 내용이나 고안거사의 뜻이 모두 당시 유유자적했던 생활상을 연상케 한다. 263.오수당(午睡堂 24.4×44.4) 두인은 백문장방인 ‘靜山□□ □□□□’라는 도서를 찍은 종이를 잘라 붙여 대신하였다. 이것은 이인문(李寅文)의 <강산무진도(江山無盡圖)> 첫머리에 보이는 것과 같은 것인데 도서의 주인과 그 내용은 아직 알지 못한다. 말미의 작가인은 주문방인 ‘김홍도사능장(金弘道士能章)’이다. ‘오수당(午睡堂)’은 ‘낮잠자는 집’이라는 뜻으로, 김홍도 자신의 당호(堂號)였다고 추측되지만 분명치 않다. 김홍도의 대자(大字)로는 드문 예이며 호쾌한 필치를 보여준다. 264.회도인시(回道人時 33.0×44.0) 두인은 백문타원인 ‘필유소용(必有所用)’이고, 말미의 도서(圖書)는 백문방인 ‘一卷石山房)’이다. 서쪽 이웃 부자건만 부족함을 근심하고/동쪽 노인 가난해도 여유있다 즐거워하네// 막걸리 걸러옴은 좋은 손님 까닭이오/황금을 다 쓴 것은 책을 사기 위함이라.-단원- 내용은 북송(北宋)때 회도인(回道人)이라는 사람이 지었다는 시로서, 소동파의 <소식시서(蘇軾時序)>에 인용되어 전하는 것이다. 이 시는 최근까지 김홍도의 자작시로 잘못 알려져 그의 생활상이나 생활신조를 드러낸 대표작으로 오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기록에 의하면 이 시가 “근래에 새로 알려져 공자나 왕손의 별장에도 새겨 걸지 않은 이가 없을 만큼 크게 유행하였다”고 한다. 265.제가야산독서당시(題伽倻山讀書堂詩 33.0×44.0) 두인(頭印)은 백문타원인 ‘필유소용(必有所用)’이고, 작가인(作家印)은 백문방인 ‘사능(士能)’이다. 포개진 바위로 미친 듯 달려와 겹겹 봉우리에 메아리치니/사람 소리 지척간에도 분간하기 어렵구나// 늘 꺼리는 건 시비하는 소리 귀에 닿는 것일러니/일부러 물을 흘려 온산에 둘렀도다// -단원 졸필- 위 시는 최치원(崔致遠)이 해인사에서 지은 것으로서, 세상사에 뜻을 잃고 은일 하려는 뜻을 그린 명작으로 유명하다. 266.시구(時句 25.7×19.6) ‘청산영리부수기(靑山影裏부수기)는 다음 7언절구 한시의 절구이다. 저녁놀 질 무렵에 홀로 우뚝 서 있더니/향그런 풀 맑은 모래에서 졸기에도 지쳤는가// 홀연히 생각난 듯 눈같은 날개 떨쳐 날아가니/푸른 산 그늘 속에 누구 기약 있었더냐// -단구- 김홍도의 그림 <석양귀소도(夕陽歸巢圖)>에 이 시의 전문이 적혀 있는데 그 작가는 미상이다. 활달하면서도 격조가 느껴지는 필적이다. 270.송하담소도(松下談笑圖 109.3×57.4) 1805년 61세의 이인문이 제작한 만년작품의 하나로 그의 구도상 특징과 활달한 운필법이 잘 드러난 대표작이다. 이인문 작품을 여기에 소개한 것은 작품의 제시(題詩)와 관지(款識)가 김홍도 글씨로 되어 있고 이인문이 김홍도의 절친한 친구였기 때문이다. 제시는 당(唐)의 시인 왕유(王維:701~761)의 <종남별업(終南別業)>이라는 오언고시(五言古時)이다. 중년에 이르러 자못 불교를 좋아하여/늙어서 집을 남산가에 터잡았네 흥이 오르면 매번 혼자 떠나가니/뛰어난 경치를 그저 나만 알뿐이네// 걸음이 다다르니 물이 끊긴 그곳이오/앉아서 바라보니 구름 이는 그 때로다 우연히 숲의 나무꾼 늙은이를 만나/이야기하고 웃느라 돌아갈 줄 모르네// 관지는 “을축년(1805) 정월에 도인 이인문과 단구 김홍도가 서묵재에게 글을 쓰고 그림 그려 육일당주인에게 드린다“인데 서묵재는 화원 박유성의 화실이름이다. 육일당주인은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는다. <송하담소도>는 동갑의 친구인 이인문과 김홍도가 갑년(甲年)이 되는 감회 깊은 해 정월을 맞아 역시 동갑인 동료 박유성의 집에 모여 슬을 한참 마시고 즐긴 후에 그린 작품이다. 그것은 김홍도의 필적 자체가 매우 여유롭고 느슨한 필세를 보이고 있으며, 또 위에 제시한 고시(古詩)의 원문을 3,4구와 5,6구를 바꾸어 쓴 점이라든가, ‘좌간우기시(坐看雲起時)에서 가운데의 기(起) 자(字)를 빼먹고 썼다가 나중에 덧붙여 쓰는 등 실수를 연발하고 있는 점에서도 짐작되는 것이다. 한편 이인문의 그림도 그의 작품 가운데서 유난히 호방한 필법을 보여주는 것인 바, 특히 소나무 끝가지를 좌우로 갈지 자(之)로 뽑아냔 부분과 거기에 친 커다란 묵점이 특히 그러하니 역시 취중작으로 짐작된다. 두 사람은 정조 연간의 회화를 대표하는 동갑의 화원으로서 먼 친척뻘이기도 했으며 평생의 지기였다. 그러한 두 사람의 우정이 작품으로 확인되는 예이다. 271.강세황 초상(姜世晃 肖像 50.9×31.0) 강세황은 김홍도의 스승이자 후원자로서 김홍도의 예술 생애에 있어 정조(正祖)와 함께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 명문 사대부 출신으로 60이 넘어 벼슬길에 올라 참판까지 지냈다. 강세황은 자신과 김홍도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 바 있다. “내가 사능(士能)과 사귄 것이 전후 대개 세 번 변하였다. 처음에는 사능이 어린 나이에 우리 집에 드나들어 혹은 그 재능을 칭찬하기도 하고 혹은 그림 그리는 요령을 가르쳐주기도 했고, 중간에는 한 관청에 같이 있으면서 아침저녁으로 서로 대했으며, 나중에는 함께 예술계에서 노닐어 지기(知己)의 느낌이 있었다. 사능이 내 글을 구하는데 다른 이에게서가 아니라 반드시 내게서 구하는 것은 역시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강세황은 부친의 나이 64에 얻은 9남매 중의 막내로서 갖은 사랑을 받으며 성장하였으므로 밝고 해학적인 성품의 소유자였는데, 이 점 또한 김홍도에게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크다. 작품은 극 사실기법에 의한 정면 관복상(官服像)이다.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로서 당시예단(?壇)의 총수라고 일컬어졌던 강세황의 예술에 관한 조예가 그 얼굴에 비춰 보이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