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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십자로 무성영화

  • 작성일2012-10-31
  • 작성자관리자
  • 조회수3670

청춘의 십자로

한국영화 역사를 다시 쓴다  ‘미몽’(1936)보다 2년 앞선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 발굴

한국영상자료원은 국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극영화 청춘의 십자로(1934, 안종화)를 발굴했다. 청춘의 십자로는 영상자료원이 지난 2005년 중국 전영자료관을 통해 발굴한 미몽(1936, 양주남)보다 2년이 앞선 작품이라는 점에서 한국영화사의 기원을 탐구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일 뿐 아니라, 복사본 필름(Print)이 아닌 원본필름(Original Negative)의 형태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가진다.

수집 당시 필름 상태

무엇보다 청춘의 십자로는 1935년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 이전에 제작된 무성영화 시대의  작품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지금까지 무성영화는 검사와 여선생(1948, 윤대룡) 한 편이 존재하였으나, 이 영화는 이미 발성영화가 보편화된 시기에 경제적인 사정으로 인해 만들어졌던 무성영화라는 점에서 본격적인 무성영화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번 발굴을 통해 무성영화 말기 우리 영화의 형태와 수준을 엿볼 수 있는계기가 마련되었고, 초기 한국영화를 통한 문화적ㆍ학술적ㆍ역사적 연구가 더욱 활기를 띌 것으로 기대된다.

청춘의 십자로는 도시에 기생하는 한량들의 타성적인 행각 속에서 분수를 지키려는 농촌 출신 청년의 새로운 사랑과 생활의 출발을 그리는 통속극이다. 1934년도 작품으로 좁은 방안에서 거울을 활용하는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기술적 시도가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또한 흥행에서도 성공하여 국내 최초로 열린 ‘조선일보 영화제’(1938년11월6일~28일)에서 애독자가 선정하는 무성영화부문 6위를 차지하기도했다.당시 1~2위는 아리랑과 임자 없는 나룻배였다.

이 영화의 영화사적 의의는 출연진의 면면에서도 확인된다. 그동안 필름이 남아있지 않아 이름만 전해지던 아리랑 (1926년)의 여주인공신일선(申一仙)이나 나운규의 뒤를 잇는 당대 최고의 액션스타 이원용(李源鎔), 잘 있거라(1927년)의 김연실 (金蓮實)과 같은무성영화 초기 스타들이 대거 출연하고 있을 뿐 아니라, 데뷔작 꽃 장사(1930년) 이후 12편의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필름이 단 한편도 남아 있지 않았던 안종화 감독의 대표작을 만날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감독 및 배우 소개

안종화 감독은 원래 배우 출신이다. 1902년생으로 연배는 같지만 나운규를 영화계에 끌어들인 선배이기도 하다. 그는 부산조선키네마(주)의 창립 작품 해(海)의 비곡(秘曲)(1924년)의 주인공으로 데뷔하여 이듬해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을 끝으로 연기생활을마감했다. 5년 뒤 꽃장사(1930년)를 계기로 감독으로 전환한 그는 1966년 죽을 때까지 청춘의 십자로를 포함하여 노래하는 시절(1930년), 은하에 흐르는 정열(1935년), 역습(1936년),인생항로(1937년), 수우(愁雨)(1948년), 나라를 위하여(1949년),천추(千秋)의 한(1956년), 사도세자(1956년), 춘향전(1958년), 견우직녀(1960년) 등 모두 12편을 남겼다. 서울 토박이로, 후학들에게 중요한 자료가 되는「한국영화측면비사」(1962년)등 몇 편의 저술을 내놓기도 했다.

주연을 맡은 이원용은 일찍이 종소리(1929년),낙화유수(1927년), 세 동무(1928년> 등에 출연하여 인기를 모은 의리파이다. 안종화의 회고에 따르면 고단의 유도 실력에다 승마 솜씨가 뛰어난 스포츠맨이라고 했다. 그래서 종로에 나가면 김두한도 형님으로 예우했고 깡패들도 꼼짝 못했다고 한다. 이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한 박연(朴淵)은 본명이 박창수(朴昌洙)로서 신인인 문경심(文耕心)과 처음에 애인 관계였으나 부부로 발전한 사이였다.

출처 : 한국영상자료원(www.koreafilm.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