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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전시관

기획전시

예담 김현진 작가의 My endless love story

2016-11-05(토) ~ 2016-11-09(수)
안산 예술의 전당 홍보3.jpg
  • 장르

  • 운영시간

    11월 5일 ~ 9일 10시~18시

  • 전시장소

    화랑전시관 제2전시실

예매일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전시소개

“저의 작품을 통해 내 안에 잃어버린 사랑, 죽음도 끊을 수 없는 가장 아름답고 완전하고 숭고한 영혼의 사랑을 찾을 수 있길 소망해 봅니다. ”-예담-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한 사랑에 대한 대서사시를 그림이란 도구로 다양한 상징어법을 써서 오케스트라 같은 느낌으로 완전한 사랑을 표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림 안에서 시와 음율이 있는 사랑을 누릴 수 있길 바랍니다.”-예담-

“작가의 그림은 전체적으로 가시적 세계와 그 비가시적 원인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미학을 요청하고 있습니다....그러한 사랑 충만한 환상적인 장면들은 축제의 잔치가 되어 지금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 이미 시연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뿐입니다......항상 변화하는 감각의 세계에 살면서도 그러나 그러한 감각자료들로부터 진실의 법칙을 조직해 내며 내적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일은 쉬운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작가는 에술의 보다 높은 자기실현을 위한 미적조건으로 혼란과 소요 너머의 사랑의 유토피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역사의 한 가운데서 노래합니다.

“내가 당신을 높이며 당신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이사야 25:1)

-안용준(미학박사)-

 

 

My endless love story

나의 영원한 사랑 이야기: 시공을 초월한 사랑의 유토피아(Utopia)

 

인간의 실존에서 사변(思辨)은 삶과 예술을 온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는 몸과 보편적 사유를 추구하는 정신 그리고 영원을 사모하는 영혼이 있습니다. 이 내면의 영혼이 영원하신 존재와 사귀며 살 때 우리는 아름다움의 평화와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작가 김현진은 시공을 초월한 사랑의 조형으로 그리스도와 인격적 관계를 맺으며 자신의 작업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감성적 열망이나 에로스(Eros)를 통하여 육적인 세계를 뛰어넘어 영원불변한 존재 자체에 다다르는 순간의 신비체험과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이 길은 그리스도 없이 존재 자체에 도달하려는 시도로서 결국 불확실성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를 의사소통하는 표상적 방식(figurative method)으로 ‘사랑’이라는 개념의 조형 형성과정과 개념적 독창성을 유려한 붓놀림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상징, 꽃, 하늘을 수놓은 하얀 사랑, 생명수, 나팔, 제의적 이미지(Bild und Kult), 소리의 암시적 표현 등 다양한 기호는 사랑의 종합을 지향하듯 인간이 거하는 땅과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이 서로 연결되어 둘이 하나가 되는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창안된 공간은 논증적 개념이 아닙니다. 실제로 인간은 단 하나의 공간만을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전체적 작품의 경향은 우주적 총체성과 시공을 초월하는 연속성의 지평위에서 취미의 진실한 객관성을 바라보는 무한성의 생각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작가는 요한이 환상 중에 본 영광스럽고 거룩한 천국(하늘)의 모습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뿌려지는 투명하고 반짝이는 안료들은 모든 인간의 삶을 에워쌌던 절망의 휘장을 제거하고 하나님이 주인이 되신 사랑의 축제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 잔치는 인류에게 내려지는 사랑의 선물이 됩니다. ‘요한계시록’에서도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선포가 혼합되듯이, 인간들 간의 대화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대화와 사랑에 근간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인간은 나에게서 너로 확장되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존 스코투스(John Scotus Eriugena, 9C)는 사람의 오감은 모두 자연계에서 즐길 수 있는 적합한 미적 특질을 발견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미학에 관하여 짤막하지만 의미 있는 논급에도 불구하고, ‘빛’의 존재(ens)와 같은 의미를 해석하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화면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대변하는 빛의 광휘가 금과 은과 펄 등의 색으로 여기저기 선명합니다. 이는 빛의 상징주의 전통 즉 빛은 신의 진과 미의 상징이라는 사상과 관련시킬 수 있습니다. 중세미학의 권위자인, 아퀴나스(Thomas Aquinas, 13C)는 이 빛이 존재의 세 가지 양태인 하나(unum)이며, 참되고(verum) 선한(bonum)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이 용어들은 근본적으로 초월적이기에, 빛의 참 이해를 위해 ‘영성’(Spirituality)이 요구됩니다.

작가의 그림은 전체적으로 가시적 세계와 그 비가시적 원인과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미학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예술사에서 일반적으로 우주란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신의 작품이 되었고, 인간의 삶과 자연은 그 기원의 징표를 보여주며 희미하거나 아득할지라도 신의 선미(善美)를 반영하며 신성의 생생한 상징으로 기대되어 왔습니다. 결국 같은 은유의 이야기인, 요철지에 혼합재료로 표현된 <승리의 노래>는 시각과 청각이 온전히 동원되지 않고서는 담아내기 어려울 정도의 눈부신 세계를 이야기합니다. 파란 사랑에 드리운 시온산의 어린양이 그분의 피 값의 사신 14만4천명을 상징하는 사랑스런 사람이 아름답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구속받은 현재의 교회가 부르는 승리의 노래였으니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생각해봅니다. 작가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그러한 축제의 연회를 기대하면서 살아가는 승리의 찬란한 실체입니다. 거룩하게 비추이는 하얀 등대와 보혈의 빛을 표현한+ 빨간 등대는 엄청난 광휘로 어둠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모든 것들을 그것의 색으로 물들입니다. 아마 이것은 옛날 옛적의 환상적인 이미지들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매우 이색적인 느낌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 충만한 환상적인 장면들은 축제의 잔치가 되어 지금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 이미 시연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뿐입니다. 작가는 이런 사실을 예견이라도 하듯 자연스레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그렇다는 말입니까? 기독교에는 종말적인 드라마가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절기와 축제들에 얼마든지 암시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미래의 축제를 미리 맛보는 미학적 경험들이며 짜릿한 예술적 상황들입니다. <용서>, <천국가정>,<성령님이 임하시는 교회>, ,<아름다운 대화>,<향기>등의 작품은 이런 관점에서 신앙 체험과 미적 계시의 독특한 본질을 반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항상 변화하는 감각의 세계 내에 살면서도 그러나 그러한 감각자료들로부터 진실의 법칙을 조직해내며 내적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독일의 미학자인 쉴러(Friedrich Schiller)가 한 고백이 떠오릅니다. “실존의 현실에 대해, 우리의 지각 내의 어떤 내용을 상기케 하는 형식적 충동(Formtrieb)은 이성적 자아의 욕구로 자아를 고갈 시킬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인간 본성의 통일성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살아 있는 형식’(Lebensform)을 구성할 만한 ‘생기’에 의존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예술의 보다 높은 자기실현을 위한 미적 조건으로 혼란과 소요 너머의 사랑의 유토피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는 역사의 한 가운데서 노래합니다. “내가 당신을 높이며 당신의 이름을 찬양합니다.”(이사야 25:1)

 

 

안용준 (미학박사, 목원대학교 산학협력단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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