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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전시관

기획전시

박상헌 개인전

2012-04-25(수) ~ 2012-05-03(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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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르

  • 운영시간

    11:00-19:00

  • 전시장소

    제3전시실

예매일이 정해지지 않았습니다

전시소개

 

서양화가 박상헌 작품전 서양화가 박상헌의 작품전이 4월 26일부터 5월 2일까지 안산문화예술의전당에서 열린다.
            뛰어난 색채 감각과 강하면서 절제된 선들이 인상적인 이번 전시회는 작가가 일상에서 겪는 소소한 일들을
            정감 있는 필치로 그려냈다.
            서양화가로서 작품에 민화풍을 담아 이른바 근대미술 이후의 미술이 근거하는 서양미술사에 대한 위반이면서
            동시에 민화적으로 현재의 일상성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회귀적 혹은 복고적이면서도 시의성을 갖는다는 평을
            받았다.
김병수(미술평론가)
            박상헌의 일상성에 대한 환유 : 큐비즘과 민화풍을 가로지르며 현실을 위반하다
            화면이 유쾌하다. 스스로 즐기는 모습이다. 박상헌의 작업은 미술사에서 익힌 세계를 자기가 일상에서 겪는 소소한 일들과 버무려 정감 있는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거의 일상의 미학이라는 경지에 다다른 것 같다. 유희가 예술인 세계이다. 필선이 활달할 뿐만 아니라 색조 또한 밝고 화려하다. 우리는 그의 일상이 어떠한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화면을 대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잘 모르는 사람 중에도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인상이 있는데 그때 일반적으로 우리가 갖는 느낌은 공통적이다. 물론 이것은 문화 상대적이다. 이러한 세계를 캔버스에 구축하는 경우 자칫잘못하면 유치해질 수 가 있는데 우리가 마주하는 타블로는 미술사가 보증하는 격을 유지하고 있다.
박상헌의 화면은 얼핏 피카소의 큐비즘을 연상시킨다고 볼 수도 있는데 인물과 사물에 대한 분석과 해석이 그러한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것 같다. 가장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를 자연의 본질적 형태라고 보았던 큐비즘의 화가들은 자연의 사물에서 그것을 추출하거나 해체해서 자연의 본질적인 재구축을 회화에서 구축하였던 것이다. 분석적 태도가 한층 심화되면 형태의 환원적인 지향은 보다 구축적인 지향으로 향한다. 이때 본질적인 자연의 추출보다는 회화로서의 본질적인 구축이 보다 강한 목표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두께가 있는 현실의 3차원을 평면으로 옮기는 것보다 오히려 회화에 두께를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무언가가 흩어졌다 겹쳐지면서 동세가 드러난다. 이 관계 속에서 이미지가 충실해진다. 재현이
아니라 계기(繼起)가 회화의 새로운 언어였던 것이다. 이는 언어가 자체적으로 거의 재현적 요소를 지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을 말로 분절하고 그것들의 차이에 의해 현실과 대위법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 지점에서 박상헌은 노선을 달리 한다. 다시 일상적인 정서의 세계로 환원하는 것이다. 미술사의 학습을 넘어서는 미학의 차원이다.
            감성의 육체성은 일상적일 수밖에 없다. 일상성이야말로 생활의 도를 깨우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작가의 일상생활을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무리 없이 박상헌의 삶을 우리의 것으로 용인하고 상상하며 즐길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화면에서 끊임없는 욕망과 불안을 보게 되기 때문이 아닐까! 역시 우리는 현대인이었던 것이다. 앙리
르페브르는 현대세계의 일상성에서 이런 말을 한다. "모든 것이 드라마이다. 삶과 죽음, 실패와 승리 이것이 모두 드라마이다. 나는 죽음에 임박한 사람들의 숫자를 세고, 그 단말마의 고통을 기록한다. 그러나 고통이 무엇인지, 무(無)가 무엇인지를 말해 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화가에게 밀어닥친 현상으로서 일상은 회화적으로 구축된다. 단지 수와 과학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또한 형이상학의 광기에로 떨어지지 않기에 그 감각은 예술적이다. 이래서 박상헌 작업의 다른 측면인 낙서화의 성격에 이르게 된다. 그래피티의 예술성은 대중성에서 나온다. 익숙하면서도 자극적이고 따라서 위반을 반복하는 영역적 특징을 갖는다. 반복이 오히려 차이를 드러내면서 다시 탈구축적인 화면을 이룩한다. 연속극이면서도 계속 딴소리를 해대는, 줄거리가 이어지지 않는 드라마가 그의 회화이다. 일상에서부터 잠재성을 끌어내는 것은 창조적 행위의 특징인 전유(專有; appropriation)의 권리를 그림으로 재정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상성에 대한 경멸을 유지해온 세계에 대한 환유가 박상헌의 회화적 특징이다. 환유는 은유에 대한 은유이다. 이때 그의 화면이 민화적 느낌으로 새삼 다가오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다. 굳이 이러한 감각을 해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그림 중에 이야기 같은 그림을 민화라고 부른다. 거기에서는 끝없는 장난기를 볼 수 있는데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데도 그 안에 이야기가 있고 무계획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계획이 있다. 민화라는 그림은 대개 그 이름이 그 의미를 나타낸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민화의 가치를 과소평가하기도 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조형성의 문제가 컸을 것이다. 정전(canon)에
충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이상 혹은 이데올로기는 회화에도 하나의 가이드라인으로 작동했었다. 거기에서는 일상보다는 이상이 중요했다. 이제 위선보다는 위반을 선택한 회화가 등장했다. 그래서 박상헌 회화미학은 이중의 위반이다. 위반의 위반인 것이다. 본인의 회화에 민화풍을 담는 것은 이른바 근대미술 이후의 미술이 근거하는 서양미술사에 대한 위반이며 동시에 민화적으로 현재의 일상성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회귀적 혹은 복고적이면서도 시의성을 갖는다는 의미에서 또 다른 위반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가 가로지르고 있는 경계선들은 그의 회화들이 보여주고 드러내는
화면만큼이나 또한 불명료하다. 그 허물어짐 혹은 융화의 현장이 평면작업이라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장소이다. 약간의 뭉개진듯한 화면이 낯설지 않고 친숙한 이유는 이미 설명한 바대로 대중성을 바탕으로 하는 그래피티와 민화적 속성으로 알 수 있다. 그럼에도 하나의 텍스트로서 그의 작품들을 호락호락 단정할 수 없게 하는 이유는 미술사에 대한 위반의 맥락을 계속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부딪히고 미끄러지며 가로지르는 회화미학을 박상헌은 수행하고 있다.

전시문의

기타